제1화. 조명의 끝, 그림자의 시작
서울의 늦가을. 찬 바람이 사람들의 외투 틈새로 스며들던 그 날, 이서준은 또 한 번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음... 인상은 나쁘지 않네요. 근데 요즘은 끼도 외모도 확실해야 해요.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에."
면접관의 담담한 한마디는 서준의 귀에 천천히, 뾰족하게 박혔다.
탈락.
익숙한 단어였다. 이서준, 21세. 데뷔 4년 차. 그러나 세상은 그를 아직 '무명'이라 불렀다. 소속사도, 팬도, 이름도 없는 사람. 연습생도 아니고, 데뷔조도 아니고, 그저 스케줄도 없는 '아이돌'이었다.
그는 거울을 보았다. 살짝 찢어진 눈매, 턱 끝에 점 하나, 흐릿한 브라운 톤 염색모. 키 181, 어깨 넓고 피지컬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거울 속 서준의 눈엔 자신이 ‘그냥 아무도 아닌 사람’처럼 보였다.
"잘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뭐, 인스타 필터 써서 그렇겠지."
서준은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그의 유일한 일상은 이렇다.
오전엔 피트니스 센터에서 알바.
오후엔 연습실에서 독학 보컬 & 댄스.
밤엔 서울 강남 뒷골목의 작은 펍 무대에서 보조 댄서.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무대. 불 꺼진 무대 아래서 그는 늘 혼자였다. 그래도 ‘춤추고 노래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버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포기하는 순간 정말 끝이니까’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펍 무대 리허설이 끝나고, 매니저 박 실장이 그를 불렀다.
"서준아, 내일 새벽 스케줄 있다. 대신 지금까지 거기들이랑은 달라. 오디션 같은 거 아냐. 방송이야. 리얼리티."
"리얼리티요?"
"어. 그 'HELL IDOL' 말야."
그 말에 서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HELL IDOL'
지옥 같은 훈련과 경쟁을 통해 진짜 스타를 뽑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실력보다 ‘서사’를 팔아먹는 곳. 외모, 배경, 인성까지 싸그리 벗겨져 대중에게 노출된다. 참가자 대부분은 살아남기보단 망가진 채 퇴장한다.
"저… 그거, 이미지 망가지는 거 아니에요?"
"이미지가 어딨어. 넌 지금 아무것도 없잖아."
서준은 말문이 막혔다.
박 실장은 이어 말했다.
"네가 뭔가 되길 바라는 사람이 나 하나뿐인 거 알아. 근데, 나도 이제 오래 못 버틴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그리고 새벽.
서준은 조명이 번쩍이는 스튜디오에 섰다.
25명의 아이돌 지망생들과 함께.
각기 다른 분위기.
명품 백 들고 온 기획사 연습생,
코디 풀세팅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인기 틱톡커,
눈으로 사람을 깔아보는 전직 배우 지망생까지.
서준은 혼자였다.
그의 옷은 블랙 트레이닝복.
화장도 안 했고, 머리는 땀에 눌려 처져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살아있었다.
"1번 참가자, 이서준. 자기소개해보세요."
MC의 말에 그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4년째 무명인 아이돌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존재감 없는 이름. 하지만 오늘부터, 무대 위에 나란히 설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현장은 조용했다.
그러다 갑자기 터지는 비웃음.
"와~ 무명 주제에 대단하다."
"진짜 서사 뽑으려고 데려왔네."
그러나 서준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건 비웃음이 아닌 경멸에 가까운 태도였다.
"웃어도 좋아요. 오늘까지만 웃으세요."
엔딩 컷
첫 번째 미션은 다음날 시작된다.
제작진이 내건 주제는 '가장 매혹적인 1분 무대'.
모든 참가자에게 단 1분.
서준은 남은 밤을 연습실에서 홀로 채웠다.
밤 3시, 허벅지에 테이핑을 감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이건 그냥 무대가 아니야.
이건 나한테 ‘살기 위한’ 무대야."
그의 손엔 낡은 이어폰.
폰 안엔 익숙한 MR.
그는 혼자 춤추고, 혼자 노래하며, 혼자 싸웠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누구도 보지 않는 새벽에서,
작고 선명한 빛의 파편 하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한 명의 스태프가 화면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야… 이거, 진짜 터질지도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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